뉴스에서는 연일 벚꽃 개화 소식이 나왔습니다. 여기저기서 벚꽃 명소 이야기가 나오고, SNS에는 벚꽃 사진이 넘쳐났습니다. 저도 예전 같으면 주말에 벚꽃 구경 가자고 배우자를 졸랐을 겁니다.
그런데 사찰에서 일하던 그해 봄은 달랐습니다.
새벽 4시 반에 일어나서 출근하다 보니, 남들이 벚꽃 구경 가는 주말 낮보다 훨씬 이른 시간에 봄을 만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새벽 출근길에서, 벚꽃보다 먼저 피는 것들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그전까지 저는 봄이 벚꽃과 함께 온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찰에서 일한 그해 봄, 그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1. 새벽 출근길에서만 볼 수 있는 봄이 있었습니다
1-1. 산수유가 먼저였습니다
3월 초, 아직 공기가 차가울 때였습니다. 사찰로 올라가는 길목에 산수유나무가 몇 그루 있었습니다. 평소엔 그냥 지나쳤는데, 어느 날 새벽 헤드라이트 불빛에 노란 것들이 보였습니다.
차를 세우고 내려서 봤습니다. 산수유였습니다. 벚꽃은커녕 개나리도 피기 전인데, 그 작고 노란 꽃들이 가지마다 조용히 피어 있었습니다.
그 새벽에 그 꽃을 보는 사람은 저밖에 없었습니다. 해가 뜨지 않은 시간이었고, 사찰 올라오는 길에 사람이 있을 리 없었으니까요. 그 순간이 이상하게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사찰에 도착해서 선배 보살님께 말씀드렸더니 웃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산수유는 원래 먼저 피어요. 아는 사람만 봐요."
아는 사람만 본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매일 새벽에 이 길을 다니는 사람만 볼 수 있는 봄이 있다는 거였으니까요.
1-2. 매화는 안개 속에서 피었습니다
3월 중순, 안개가 짙은 새벽이었습니다. 사찰 경내 한쪽에 매화나무가 있었는데, 그날 아침 안개 속에서 하얀 꽃들이 피어 있는 걸 봤습니다.
안개와 매화가 섞여 있으니 꽃인지 안개인지 경계가 없었습니다. 사진을 찍으려고 핸드폰을 꺼냈는데, 찍고 나서 보니 그 느낌이 전혀 담기지 않았습니다.
그날 이후로 풍경 사진을 별로 찍지 않게 됐습니다. 눈으로 보는 것과 사진으로 남기는 것이 다르다는 걸 그때 처음 제대로 느꼈거든요.
선배 보살님이 공양 준비하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매화 봤어요? 올해 잘 폈네."
짧은 말씀이었지만, 그분도 매일 그 꽃을 보고 계셨다는 게 왠지 반가웠습니다.
1-3. 풀이 먼저 올라오고 있었습니다
꽃보다 더 먼저 온 봄이 있었습니다. 3월 초, 사찰 마당 돌 틈에서 아주 작은 풀들이 올라오기 시작했습니다.
청소하러 마당에 나갔다가 발견했습니다. 아직 다른 건 아무것도 없는데, 돌 사이에서 연두색 새싹들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습니다. 손으로 만져보니 얼마나 여린지, 숨만 쉬어도 꺾일 것 같았습니다.
그게 봄이었습니다. 벚꽃도, 개나리도 아니고, 돌 틈에서 올라오는 작은 풀싹. 그게 가장 먼저 온 봄이었습니다.
스님이 마당을 지나시다가 그 풀을 보시더니 잠깐 멈추셨습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다시 걸어가셨습니다. 그 잠깐의 멈춤이 저는 오래 기억에 남았습니다.
2. 사찰의 봄은 소리로도 왔습니다
2-1. 새소리가 달라지는 걸 알게 됐습니다
새벽마다 출근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소리에 예민해졌습니다. 겨울 새벽은 조용했습니다. 가끔 바람 소리, 아니면 멀리서 차 지나가는 소리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3월이 되자 새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엔 한두 마리였는데, 날이 갈수록 소리가 많아졌습니다. 공양간 창문을 열면 새소리가 먼저 들어왔습니다.
선배 보살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새소리 많아지면 봄 온 거예요. 꽃보다 새가 먼저 알아요."
그 말을 듣고 나서는 아침마다 창문을 열면서 새소리를 들었습니다. 새소리가 얼마나 많아졌는지가 봄이 얼마나 왔는지를 알려주는 것 같았습니다.
2-2. 법당 처마 끝 풍경 소리가 달라졌습니다
겨울 내내 법당 처마 끝 풍경은 차갑고 맑은 소리를 냈습니다. 바람이 세게 불 때는 경쾌하게, 바람이 없을 때는 가끔 한 번씩 조용히 울렸습니다.
봄이 오면서 그 소리가 달라졌습니다. 바람이 부드러워지니까 풍경 소리도 부드러워졌습니다. 겨울 풍경 소리가 맑고 선명하다면, 봄 풍경 소리는 느리고 여유로웠습니다.
공양 준비하면서 그 소리를 들으면 이상하게 마음이 풀어졌습니다. 국 끓이는 소리와 풍경 소리가 섞이는 그 새벽 공양간이, 지금 생각해도 그립습니다.
2-3. 스님 예불 소리에서도 봄이 들렸습니다
이건 설명하기가 조금 어렵습니다.
새벽 예불 소리는 겨울이나 봄이나 다를 게 없습니다. 목탁 소리, 독경 소리. 그런데 이상하게 봄이 되면서 그 소리가 다르게 들렸습니다.
제 마음이 달라진 건지, 아니면 봄 새벽 공기가 소리를 다르게 전달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냥 같은 소리인데, 봄 새벽에 들리는 예불 소리는 조금 더 따뜻하게 느껴졌습니다.
선배 보살님께 그 이야기를 했더니 한참 웃으셨습니다.
"당신도 이제 봄을 느끼는 귀가 생긴 거예요."
3. 새벽에만 볼 수 있는 봄의 색이 있었습니다
3-1. 해 뜨기 직전 하늘 색깔
낮에 보는 하늘과 새벽에 보는 하늘은 완전히 다릅니다. 겨울 새벽 하늘이 차갑고 투명한 검은빛이라면, 봄 새벽 하늘은 달랐습니다.
해가 뜨기 30분 전쯤, 하늘이 아주 연한 보라빛으로 물듭니다. 보라라기도 애매하고, 파랗다고 하기도 애매한 그 색. 사찰 마당에서 그 하늘을 올려다보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습니다.
그 색은 해가 뜨고 나면 사라집니다. 사람들이 깨어나는 시간에는 이미 없어지는 색이에요. 새벽에 일어나는 사람만 볼 수 있는 하늘이었습니다.
사찰에서 일하지 않았다면 평생 몰랐을 색이었습니다.
3-2. 이슬이 맺힌 풀잎의 색
마당 청소를 하러 나가면 이른 봄 새벽에는 풀잎마다 이슬이 맺혀 있었습니다. 해가 뜨기 전이라 아직 어두운데, 그 이슬들이 희미한 빛을 받아 반짝였습니다.
빗자루로 쓸다가 그 이슬 맺힌 풀잎들을 건드리면 이슬이 후두두 떨어졌습니다. 그 소리가 작고 청명했습니다.
청소하다 말고 한참 그걸 보고 있었습니다. 선배 보살님이 제 옆을 지나가시다가 말씀하셨습니다.
"봄 새벽 이슬은 약이에요. 눈에 담아 두세요."
그 말씀이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르겠지만, 그 이후로 새벽 청소할 때마다 이슬을 눈에 담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3-3. 벚꽃이 피었을 때, 남들과 다른 걸 봤습니다
드디어 벚꽃이 피었습니다. 사찰 올라오는 길 양쪽으로 벚나무가 있었는데, 어느 날 새벽 출근길에 그 꽃이 활짝 핀 걸 봤습니다.
낮에 사람들이 보는 벚꽃과 새벽에 보는 벚꽃은 달랐습니다. 주변이 고요하고, 아무도 없고, 헤드라이트 불빛과 새벽빛 사이에서 보이는 벚꽃은 낮에 보는 것보다 오히려 더 선명했습니다.
그리고 그 벚꽃을 보면서 저는 이상하게 담담했습니다. 산수유, 매화, 풀싹, 이슬을 거쳐서 온 봄이었으니까요. 벚꽃이 마지막 순서처럼 느껴졌습니다.
그해 벚꽃이 진 후에 선배 보살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벚꽃은 화려하게 오고 화려하게 지죠. 그래서 더 아쉬운 거예요."
4. 그해 봄이 제게 남긴 것
4-1. 봄을 보는 속도가 달라졌습니다
사찰에서 일하기 전 저에게 봄은 벚꽃이었습니다. 벚꽃이 피면 봄이 온 거고, 벚꽃이 지면 봄이 간 거였습니다. 그 사이에 있는 것들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해 봄은 달랐습니다. 산수유부터 시작해서 매화, 풀싹, 새소리, 이슬, 하늘 색깔, 그리고 마지막으로 벚꽃. 봄이 이렇게 천천히, 많은 것들을 데리고 온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새벽에 일어나지 않았다면, 사찰에 출근하지 않았다면, 절대 몰랐을 것들이었습니다.
4-2. 지금도 3월이 되면 일찍 일어납니다
사찰 일을 마친 후에도 3월이 되면 이상하게 새벽에 눈이 떠집니다. 습관이 된 건지, 아니면 그해 봄이 몸에 새겨진 건지 모르겠습니다.
일찍 눈이 뜨이면 가끔 밖에 나가봅니다. 동네 골목이지만, 이맘때면 어디선가 산수유 노란 꽃이 보이고, 돌 틈에서 풀싹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그걸 보면 그해 사찰 출근길이 떠오릅니다.
4-3. 벚꽃보다 먼저 피는 것들
봄은 벚꽃과 함께 오지 않습니다. 벚꽃보다 훨씬 일찍, 아무도 모르게, 조용한 것들이 먼저 옵니다.
산수유가 먼저 피고, 매화가 안개 속에서 피고, 돌 틈에서 풀이 올라오고, 새소리가 많아지고, 하늘 색이 달라지고. 그것들을 다 지나고 나서야 벚꽃이 옵니다.
새벽 사찰 출근길이 가르쳐 준 것 중에, 이게 가장 오래 남은 것 같습니다.
봄은 기다리는 게 아니라, 새벽에 일어나는 사람에게 먼저 오는 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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