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4/16

사찰 근무 중 가장 힘들었던 날, 대중공양 300인분 준비기

 그날 아침 공양간 문을 열었을 때, 뭔가 다르다는 걸 바로 느꼈습니다.

평소엔 조용하게 시작되는 아침인데, 그날은 이미 분위기가 달랐습니다. 보살님들 움직임이 빨랐고, 표정이 집중돼 있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등이 쫙 펴졌습니다.

대장 보살님이 저를 보시더니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300인분이에요. 각오하고 시작해요."

300인분.

집에서 30년 넘게 밥을 해왔습니다. 명절에 식구들 모이면 20명분도 거뜬하게 했습니다. 스스로 요리 베테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자신감이 그날 완전히 산산조각 났습니다.


1. 도구부터 달랐습니다

1-1. 제 팔뚝만 한 칼이 앞에 놓였습니다

자리를 잡으려는데 선배 보살님이 평소와 다른 칼을 꺼내셨습니다. 집에서 쓰는 식칼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크기도 무게도.

그걸 제 앞에 놓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은 이거 써야 해요."

들어봤습니다. 무거웠습니다. 이걸로 몇 시간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 손목이 걱정됐습니다.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욕조만 한 다라가 여러 개 나왔습니다. 평소에 쓰던 중간 크기 대야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들어가도 될 것 같은 크기였습니다.

"300명분은 도구부터 달라요. 작은 도구로 많이 하려고 하면 사람이 먼저 쓰러져요."

도구가 달라지면 방식도 달라진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습니다.

1-2. 무를 써는데 손끝 감각이 사라졌습니다

첫 번째 임무는 무 채 썰기였습니다.

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한 개, 두 개, 열 개. 팔이 리듬을 타기 시작할 때쯤 스무 개를 넘겼습니다. 서른 개가 됐을 때 손끝이 저려왔습니다. 마흔 개가 넘자 손끝 감각이 없어졌습니다.

집에서 무 채 썰어봤습니다. 많이 썰어봤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건 달랐습니다. 숫자가 달라지니까 몸이 버티는 방식도 달라야 했습니다.

나 살림 30년 했어, 라는 자만심은 서른 개쯤에서 사라졌습니다. 그 자리를 채운 건 딱 하나였습니다.

"제발 무 하나만 더 썰면 끝이라고 말해주세요."

속으로 그 기도를 수십 번 했습니다.

1-3. 속도보다 리듬이 중요했습니다

한 시간쯤 지났을 때 대장 보살님이 제 옆을 지나가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무 빠르게 하려고 하지 말아요. 리듬을 유지해야 끝까지 가요."

그 말이 그때는 무슨 말인지 몰랐습니다. 빨리 끝내야 하는데 왜 천천히 하라는 건지.

그런데 두 시간이 지나니까 알았습니다. 처음에 힘을 다 쓴 사람은 두 시간째에 무너졌습니다. 일정한 속도를 유지한 사람은 네 시간째에도 살아 있었습니다.

300인분은 단거리 달리기가 아니라 마라톤이었습니다. 처음부터 그걸 알았다면 좀 더 현명하게 시작했을 텐데, 저는 그걸 몸으로 배웠습니다.


2. 허리는 끊어질 것 같은데 표정을 지켜야 했습니다

2-1. 대장 보살님의 말씀이 처음엔 너무 했습니다

오전 세 시간이 지났을 때 허리가 본격적으로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서서 일하는 시간이 길어지니까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았습니다. 잠깐이라도 앉고 싶었습니다.

그때 대장 보살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힘들다고 인상 쓰면 그 기운이 밥 먹는 사람한테 가요. 힘들수록 웃고 염불해요."

솔직히 그 순간 속으로 이건 너무한다 싶었습니다. 허리가 이 지경인데 웃으라니요.

그래도 따랐습니다. 인상 쓰는 게 공양간 규칙에 어긋난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억지로 표정을 폈습니다. 그리고 입으로 짧게 염불을 읊기 시작했습니다.

2-2. 신기한 일이 생겼습니다

억지로 시작한 염불이었는데, 10분쯤 지나니까 달라지는 게 느껴졌습니다.

허리는 여전히 아팠습니다. 그런데 그 통증에 온전히 집중하던 마음이 조금 분산됐습니다. 입으로 염불을 하면서, 이 음식을 드실 분들을 생각하게 됐습니다.

300명. 오늘 이 공양을 먹을 300명의 사람들. 그분들이 건강하시길, 마음이 편안하시길 바라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올라왔습니다.

신기하게도 그 마음이 올라오는 순간, 허리 통증이 아까보다 덜 느껴졌습니다.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그걸 견디는 방식이 달라진 느낌이었습니다.

대장 보살님 말씀이 맞았습니다. 육체의 한계를 넘으니 마음의 정성이 시작됐습니다.

2-3. 잡념이 사라지는 순간이 왔습니다

오후가 됐을 때 이상한 경험을 했습니다.

몸은 극도로 피곤했는데, 머릿속이 오히려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평소 일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는데, 그날은 그런 잡념이 없었습니다. 오직 지금 이 나물을 무치는 것, 지금 이 전을 부치는 것에만 집중됐습니다.

나중에 선배 보살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몸이 한계에 오면 쓸데없는 생각을 할 여유가 없어져요. 그게 오히려 순수한 상태가 되는 거예요."


3. 배식이 시작됐습니다

3-1. 폭풍 같은 배식 시간

오전부터 준비한 음식이 드디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배식은 빠르게 진행됐습니다. 한 분 한 분 공양상을 받아 가시는 모습을 보면서 이상한 감정이 올라왔습니다. 아침부터 이 음식을 위해 움직였다는 게, 지금 저 한 그릇으로 연결된다는 게.

300명이 줄지어 공양을 받아 가셨습니다. 오전 내내 흘린 땀방울들이 저 줄 안에 있었습니다.

배식하면서 한 분 한 분 눈을 마주쳤습니다. 대부분 고개를 숙이며 조용히 받아 가셨습니다. 그 모습이 아침의 피로를 조금씩 녹여줬습니다.

3-2. 빈 그릇 300개를 봤을 때

배식이 끝나고 그릇이 돌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설거지 산더미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릇을 보는 순간 멈췄습니다.

잔반이 없었습니다. 300개 그릇이 깨끗하게 비워져 있었습니다. 남긴 분이 거의 없으셨습니다.

그 빈 그릇들을 보면서 이상하게 눈물이 날 것 같았습니다. 아침부터 흘린 땀이 저 빈 그릇으로 돌아온 것 같았습니다.

선배 보살님이 옆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빈 그릇이 최고의 칭찬이에요."

그 말이 그날 들은 말 중에 가장 크게 남았습니다.

3-3. 설거지까지 마쳤을 때

빈 그릇 300개의 설거지를 마쳤습니다. 공양간 정리까지 끝냈을 때 시계를 봤습니다.

오후 4시였습니다. 새벽 3시 반부터 시작했으니 12시간이 넘었습니다.

자리에 앉았습니다. 다리가 파들거렸습니다. 손은 저렸습니다. 허리는 이미 한 시간 전부터 감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분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뭔가 충만한 느낌이었습니다.

대장 보살님이 마지막에 말씀하셨습니다.

"300명의 배를 채웠어요. 300개의 복을 지은 거예요."


4. 집에 돌아와서

4-1. 숟가락을 들 기운이 없었습니다

집에 도착했을 때 배우자가 밥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식탁 앞에 앉았는데 숟가락을 들 기운이 없었습니다. 300명분 밥을 만든 사람이 정작 자기 밥은 못 먹고 쓰러질 것 같았습니다.

배우자가 수저를 쥐어줬습니다. 억지로 몇 숟갈 먹고 소파에 누웠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잠들었습니다.

꿈에서도 공양간이 보였습니다. 그 활기차고 따뜻한 분위기가 꿈속에도 이어졌습니다. 이상하게 나쁜 꿈이 아니었습니다.

4-2. 다음 날 아침에 든 생각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뜨면서 든 생각이 있었습니다.

내 몸 하나가 힘들어서 300명이 밥을 먹었다.

그 생각이 아침부터 마음을 이상하게 따뜻하게 만들었습니다. 30년 동안 가족 밥을 해왔는데, 그건 많아야 열 명, 스무 명이었습니다. 300명은 다른 무게였습니다.

그날 이후로 공양간 일이 다르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힘들다는 생각보다, 내가 이 일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다는 생각이 더 커졌습니다.

4-3. 50대 막내가 버틴 이유

6개월을 돌아보면 그날이 가장 힘든 날이었습니다. 체력적으로는요.

그런데 그날이 가장 많이 바꿔놓은 날이기도 했습니다.

내 한계가 어디인지 알았고, 그 한계를 넘으면 다른 세계가 열린다는 걸 알았습니다. 육체가 한계에 오면 쓸데없는 자존심이나 잡념이 사라지고 오직 본질만 남는다는 것도요.

50대에 시작한 막내 고생이 사실은 제 인생에서 가장 정성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증거였습니다.

300인분 그날이 그걸 가장 선명하게 보여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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