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30년 넘게 살림을 했습니다.
설거지만큼은 자신 있었습니다. 빠르게, 깔끔하게, 효율적으로. 우리 집 그릇은 제가 제일 잘 안다고, 속으로 은근히 자부심도 있었습니다. 그 30년 경력을 믿고 사찰 공양간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첫날, 설거지를 다시 배워야 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50대에 공양간 막내가 됐습니다. 이곳에선 제가 제일 어렸습니다. 선배 보살님들은 다들 연세가 있으셨는데, 경험도 연륜도 저보다 훨씬 깊으셨습니다. 처음엔 그게 묘하게 어색했습니다. 50대가 막내라니.
그런데 6개월이 지난 지금, 그 어색함이 가장 큰 선물이었다는 걸 압니다.
설거지 하나가 30년 살림 경력자를 고개 숙이게 만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오늘 솔직하게 써보겠습니다.
1. "그릇 부딪치는 소리를 내지 마라"
1-1. 집에서 설거지는 늘 시끄러웠습니다
돌아보면 집에서 설거지할 때 항상 뭔가 틀어놓고 했습니다. TV 소리, 라디오 소리, 아니면 머릿속으로 오늘 있었던 일을 되새기거나 내일 할 일을 생각하거나. 손은 그릇을 닦고 있는데 정신은 딴 데 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가끔 쨍그랑 소리가 났습니다. 그릇끼리 부딪치는 소리, 싱크대에 세게 내려놓는 소리.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설거지가 원래 그런 거 아닌가 싶었습니다.
사찰 공양간 첫날, 저는 습관대로 했습니다. 그릇을 집어서 닦고 내려놓는데 소리가 났습니다. 작은 소리였는데, 공양간이 워낙 조용하다 보니 그 소리가 크게 울렸습니다.
선배 보살님이 하던 일을 멈추고 저를 보셨습니다.
"소리 내지 말아요."
딱 한마디였습니다.
1-2. 소리를 내지 않으려니 전혀 다른 동작이 됐습니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해봤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습니다.
그릇을 조심히 집어야 하고, 내려놓을 때도 살며시 놓아야 하고, 그릇끼리 닿지 않게 간격을 유지해야 했습니다. 그러려면 온 신경이 손끝에 가야 했습니다. 딴생각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생겼습니다. 온 신경을 손끝에 집중하다 보니까, 머릿속이 조용해졌습니다. 아까까지 복잡하게 돌아가던 생각들이 사라지고, 그릇을 닦는 손의 감촉, 물 온도, 거품이 일어나는 것만 느껴졌습니다.
그게 집중이었습니다. 30년 설거지를 하면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종류의 집중이었습니다.
선배 보살님이 나중에 말씀하셨습니다.
"그릇과 그릇이 부딪치는 소리는 내 마음이 흐트러졌다는 신호예요. 소리가 없어지면 마음도 잠잠해지는 거예요."
무념무상이 거창한 게 아니었습니다. 수세미질 한 번 안에 그게 있었습니다.
2. 30년 살림 고집, 공양간에서 닦아냈습니다
2-1. 속으로 이런 마음이 있었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립니다.
공양간에 들어가서 처음 한 달, 속으로 이런 마음이 있었습니다. 나도 30년 넘게 살림한 사람인데. 설거지 정도야 내가 더 잘 알지. 보살님이 뭘 지적하실 때마다 표정은 고개를 끄덕였는데, 마음 한구석은 살짝 튀어나와 있었습니다.
그 고집이 얼마나 단단한지 본인도 몰랐습니다.
어느 날 대장 보살님이 제가 닦은 냄비를 다시 닦으셨습니다. 제가 보는 앞에서요. 아무 말씀 없이 그냥 다시 닦으셨습니다. 그게 말 한마디보다 더 크게 박혔습니다.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집에 오는 길에 괜히 기분이 언짢았습니다.
2-2. 기름때를 닦다가 알아챘습니다
며칠 후였습니다. 큰 솥에 붙은 기름때를 닦는데, 쉽게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한 번 훑으면 될 줄 알았는데 아니었습니다. 여러 번 문질러야 했습니다.
그 기름때를 박박 닦으면서 갑자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게 나 같다.
내 안에 30년 동안 쌓인 '내가 해봐서 아는데'라는 고집이, 이 기름때처럼 여러 번 닦아야 지워지는 거 아닐까. 한 번에 안 되는 게 당연한 거 아닐까.
그 생각이 드니까 대장 보살님이 제 냄비를 다시 닦으신 게 다르게 보였습니다. 혼내신 게 아니었습니다. 다시 보여주신 거였습니다.
그날부터 보살님이 지적하실 때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그릇이 뽀득뽀득해질수록 마음의 날 선 고집도 둥글게 깎여요."
선배 보살님이 하신 말씀인데, 그게 진짜라는 걸 기름때를 닦으면서 알았습니다.
2-3. 50대의 경험이 짐이 될 수 있다는 것
사찰에서 배운 것 중에 이게 가장 충격적이었습니다.
경험이 많다는 게 때로는 새로 배우는 걸 막는다는 것. 30년이 자산이기도 하지만, 그 30년이 눈을 가릴 수도 있다는 것.
막내로 들어가서 처음부터 배우는 자세를 가지는 것. 그게 나이와 상관없이 필요하다는 걸, 설거지를 하면서 알았습니다.
3. 끝이 아닌 다음을 준비하는 마음
3-1. 집 설거지의 끝과 공양간 설거지의 끝이 달랐습니다
집에서 설거지는 그릇을 다 닦으면 끝이었습니다. 건조대에 올려놓고 물이 알아서 마르면 됐습니다. 싱크대에 물이 조금 남아 있어도 곧 마를 거니까 그냥 넘겼습니다.
공양간은 달랐습니다.
그릇을 다 닦고 나서가 시작이었습니다. 싱크대 안쪽 물기를 마른 행주로 닦고, 수도꼭지 주변도 닦고, 개수대 바깥쪽도 닦았습니다. 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닦아내야 했습니다.
처음엔 이게 왜 필요한가 싶었습니다. 어차피 또 쓸 텐데.
3-2. 다음 사람을 위한 마음이었습니다
선배 보살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머문 자리가 깨끗해야 다음 사람이 기분 좋게 시작할 수 있어요. 그게 배려예요."
그 말을 듣고 나서 싱크대를 닦는 마음이 달라졌습니다.
내가 지금 닦는 이 물기 하나가, 다음에 이 자리에 올 사람의 첫 느낌을 만든다는 것. 나 하나 편하자고 대충 하지 않는 마음. 그게 공양간에서 말하는 자비의 시작이라는 걸 6개월 만에 몸으로 알았습니다.
집에서도 달라졌습니다. 설거지를 마치고 싱크대를 닦는 게 습관이 됐습니다. 가족 중 누가 주방을 쓸 때 깨끗한 싱크대를 보고 기분 좋게 시작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요.
3-3. 마무리가 다음의 시작이라는 것
공양간에서 배운 것 중에 이게 일상에서 가장 많이 쓰입니다.
어떤 일이든 마무리를 깔끔하게 하면, 다음이 달라집니다. 대충 끝낸 일은 다음에 다시 걸리고, 제대로 마무리한 일은 다음을 깨끗하게 열어줍니다. 설거지에서 배운 원칙이 일 전반에 적용됐습니다.
4. 집에서도 해볼 수 있는 사찰식 설거지
4-1. 딱 5분, 소리에 집중해 보세요
사찰식 설거지를 거창하게 시작할 필요 없습니다. 딱 하나만 바꿔보세요.
오늘 저녁 설거지할 때 TV를 끄고 해보세요. 라디오도, 핸드폰도 내려놓고. 물 흐르는 소리, 그릇 표면의 감촉, 거품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에만 집중해 보세요.
5분이면 됩니다. 그 5분이 하루 중 가장 조용한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싱크대 명상이라고 부르고 싶을 만큼요.
4-2. 세제는 적게, 정성은 가득
사찰 공양간에서는 물을 아꼈습니다. 물을 틀어놓고 그냥 쓰는 게 아니라, 미리 받아둔 물에 그릇을 불려서 씻었습니다.
세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거품이 많다고 깨끗한 게 아니었습니다. 적당한 양으로 정성껏 닦는 것, 그게 더 깨끗하고 헹굼도 쉬웠습니다.
물을 아끼는 것, 세제를 아끼는 것. 그게 환경을 생각하는 마음이기도 하고, 있는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기도 했습니다.
4-3. 마무리는 마른 행주로
설거지 후 싱크대 주변 물기를 마른 행주로 닦아보세요.
처음엔 번거롭습니다. 그런데 이틀, 사흘 하다 보면 달라집니다. 주방이 정돈되면 집 전체 기운이 달라지는 느낌이 옵니다. 그리고 다음에 주방에 들어올 때 기분이 다릅니다.
가족 중 누군가 먼저 주방을 쓸 때, 깨끗한 싱크대가 작은 선물이 됩니다.
5. 6개월 공양간 막내가 배운 것
5-1. 설거지가 수행이라는 말의 진짜 의미
처음 공양간에서 설거지가 수행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냥 좋은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6개월이 지나고 나서 그 말의 진짜 의미를 알 것 같습니다.
수행은 특별한 곳에서 특별한 자세로 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을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가 수행이었습니다. 설거지 하나를 소리 없이, 정성껏, 마무리까지 깔끔하게 하는 것. 그 안에 마음 다스리는 법이 다 들어 있었습니다.
5-2. 30년이 가족을 위한 시간이었다면
주부로서의 30년이 가족을 먹여 살린 시간이었다면, 공양간에서의 6개월은 저 자신을 닦아내는 시간이었습니다.
고집을 닦아내고, 자존심을 내려놓고, 내 방식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배웠습니다. 그 배움이 설거지에서 왔다는 게 아직도 신기합니다.
허리도 아팠고, 왜 사서 고생인가 싶은 날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깨끗해진 그릇을 볼 때마다 마음도 새로 태어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5-3. 오늘 저녁 설거지 앞에서
오늘 저녁 산더미 같은 설거지 거리 앞에서 한숨이 나오신다면,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지금 이 설거지가 나를 닦는 시간이라고요.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그냥 소리 없이 한 그릇, 정성껏 한 그릇.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선배 보살님이 하신 말씀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그릇이 깨끗해지면 마음도 깨끗해져요. 그게 공양간에서 배우는 첫 번째 공부예요."
50대에 막내로 시작한 공양간 생활. 배운 것 중 설거지가 첫 번째였고, 지금도 가장 오래 남은 것입니다.
여러분의 부엌이 세상에서 가장 평온한 수행처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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